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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 생물학

얼음처럼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남는 물고기 – 남극 얼음어의 혈액 구조

by mint224 2025. 7. 29.

남극의 바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 중 하나다. 바닷물의 온도는 평균 영하 1.8도까지 떨어지지만, 염분 농도가 높아 얼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환경은 대부분의 물고기에게는 치명적이지만, 놀랍게도 이 바다에서 천천히 헤엄치는 독특한 생명체가 존재한다. 바로 얼음어(Icefish), 과학적으로는 **노토텐니아과(Channichthyidae)**에 속하는 물고기들이다. 이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적혈구가 없고, 헤모글로빈이 존재하지 않는 척추동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독특한 혈액 구조는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 대상이며, 극한 환경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넓히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얼음 물고기1


세계 유일의 무색 혈액 – 헤모글로빈이 없는 물고기

얼음어는 혈액에 붉은색을 띠는 **헤모글로빈(hemoglobin)**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모든 척추동물은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을 통해 산소를 운반한다. 그러나 얼음어는 진화 과정에서 헤모글로빈 유전자가 완전히 비활성화되었으며, 적혈구도 퇴화되었다. 그 결과 혈액은 무색에 가깝고, 산소 운반 능력은 극히 낮은 상태다.

 

그렇다면 얼음어는 어떻게 산소 부족 없이 생존할 수 있을까? 이는 여러 가지 대체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된다.


1. 차가운 물속에서 더 많은 산소 용해

남극 해역은 낮은 수온 덕분에 물속에 녹아 있는 산소 농도가 매우 높다. 물의 온도가 낮을수록 기체 용해도가 증가하기 때문에, 남극 바닷물에는 일반 해역보다 산소가 2배 이상 더 많이 녹아 있을 수 있다. 이는 혈액 내 산소 운반체가 없어도, 비교적 손쉽게 산소를 흡수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제공한다.

 

또한 얼음어는 피부를 통해 산소를 일부 흡수할 수 있다. 이는 ‘피부 호흡’을 통한 산소 보조 흡수 방식으로, 얇은 피부와 풍부한 혈관 구조 덕분에 가능하다.


2. 거대한 심장과 혈관 – 순환 시스템의 진화

헤모글로빈이 없는 대신, 얼음어는 심장 크기와 혈액량을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보완한다. 일반 어종에 비해 심장은 약 4~5배 크며, 심박수는 낮지만 1회 박출량이 매우 크다. 이 거대한 심장은 산소가 희박한 혈액을 빠르고 넓게 순환시켜, 산소 전달 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또한 전체 혈액량도 다른 물고기보다 2~3배 정도 많다. 이는 적은 산소를 담은 혈액을 더 많이, 더 자주 순환시키기 위한 진화적 전략이다. 즉, 혈액 1mL당 운반되는 산소량이 적기 때문에, 순환 속도와 부피로 이를 보완하는 것이다.


3. 얇고 투명한 혈액 – 점도가 낮아 순환 효율 극대화

일반적인 혈액은 적혈구와 혈장으로 구성되며, 점성이 꽤 높다. 반면, 얼음어의 혈액은 적혈구가 없기 때문에 점도가 낮고 유체 흐름이 매끄럽다. 이러한 특성은 좁은 혈관에서도 혈액이 쉽게 흐르게 하며, 심장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체내 구석구석까지 산소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점도가 낮기 때문에 혈관 손상도 줄고, 혈액 순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도 절약된다. 이는 극저온 환경에서 느리게 살아가는 얼음어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다.

 

얼음 물고기2


4. 낮은 대사율과 느린 활동 – 산소 소비 자체를 줄인다

남극 바다의 생물은 전반적으로 느린 대사율을 가지고 있다. 얼음어 역시 예외는 아니며, 활동 속도가 매우 느리고, 체온도 거의 환경 온도와 같다. 이는 몸에서 필요로 하는 산소의 양 자체를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마치 연료가 부족한 차량이 연비 운전을 하듯, 얼음어는 산소가 부족한 조건에서도 무리 없이 생존할 수 있도록 전체적인 에너지 소모량을 최소화한다.

 

심지어 일부 얼음어는 겨울철 동안 반휴면 상태에 가까운 생리 작용을 유지하며, 산소 소모를 극도로 억제한다. 이러한 느린 생리 작용은 헤모글로빈 없는 혈액 구조와 함께,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강력한 전략으로 작용한다.


5. 산소 저장 단백질 ‘미오글로빈’의 특수화

얼음어의 혈액에는 헤모글로빈이 없지만, **근육 조직에는 산소 저장 단백질인 미오글로빈(myoglobin)**이 남아 있다. 특히 심장과 일부 뼈대근에서는 미오글로빈 농도가 높아, 순간적으로 산소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를 공급받을 수 있다.

 

또한 얼음어 중 일부 종은 심장에 미오글로빈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더 낮은 산소 환경에서도 살아남도록 진화한 사례다. 반대로 일부 종에서는 미오글로빈의 산소 친화도를 높이거나, 반응 속도를 높여 산소 효율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이는 개체별, 종별로 진화 경로가 달랐음을 의미한다.


6. 항동결 단백질(Antifreeze Protein, AFP)의 존재

얼음어는 혈액 내에 **항동결 단백질(AFPs)**을 생성하여 혈장이 얼지 않도록 보호한다. 이 단백질은 얼음 결정이 성장하는 것을 막고, 결정의 형성을 억제함으로써 -1.8도의 바닷물에서도 혈액이 얼지 않게 한다.

 

AFP는 남극 해양 생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생존 전략이며, 얼음어의 무색 혈액이 낮은 온도에서도 유동성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다. 이 단백질은 산업적으로도 냉동식품, 장기 보존 기술 등에 응용이 가능해 현재 활발히 연구 중이다.


결론: 얼음 아래의 생명, 새로운 생물학의 시작점

얼음어는 단순한 남극 생물이 아니다. 이들은 적혈구 없이도 살아남는 유일한 척추동물로서, 생물학의 경계와 생존의 조건에 대한 정의를 바꾸는 존재다. 혈액 내 산소 운반 시스템이 사라진 대신, 순환계, 조직 구조, 대사 시스템 등에서 놀라운 진화를 이루어냈다. 이는 단순한 변이의 결과가 아니라, 수천만 년 동안 남극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도의 생존 전략이다.

 

얼음어의 생리학적 구조는 향후 우주 생명체 연구, 인공 혈액 개발, 극한 환경 생명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길을 찾는다. 남극의 얼음 아래, 무색의 혈액이 흐르는 작은 물고기가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얼음어3